삼민주의
중화민국 |
---|
|
|
삼민주의(중국어 정체자: 三民主義 산민주이[*])는 쑨원이 발표한 초기 중화민국 정치 강령으로, 민족주의(民族主義), 민권주의(民權主義), 민생주의(民生主義)를 뜻한다. 삼민주의는 건국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화민국 정치 사상이다.
노력
[편집]- 1905년, 쑨원(1866년-1925년)은 중국동맹회가 창성되었을 때, 동맹회의 민보(民報) 발간사를 통해서 "驅除韃虜(만주족 축출), 恢復中華(중화 회복), 創立民國(민국 창립), 平均地權(토지 소유의 균등)"을 동맹회의 강령으로 채택한 바 있다.
- 1906년 무렵, 이 네 가지 내용을 삼민주의로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 쑨원은 삼민주의를 수정하고 발전시겼고, 이의 설파에 노력하였다.
- 1924년 1월부터 8월까지 16회에 걸쳐서 삼민주의의 강연을 한 바 있고, 쑨원이 1925년 병사함에 따라 민생주의의 부분이 미완의 전개로 끝났지만, 그의 강연 내용은 "삼민주의"에 정리되어서 출판되었다.
변화
[편집]- 최초에 발표된 삼민주의와 쑨원 사망 전의 삼민주의,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각자 계승한 삼민주의에는 모두 특색이 있다. 변화되는 삼민주의에는 당시의 시대상과 각 파벌 노선이 반영된다.
- 1905년 초기의 삼민주의는 "驅除韃虜(만주족 축출), 恢復中華(중화 회복), 創立民國(공화국 창립), 平均地權(토지 소유의 균등)"을 주장한다.
- 1919년 5.4 운동 무렵에는 반군벌, 반제국주의적 주장이 삼민주의의 민권주의 사상에 포함되었다.
- 1924년 중국 국민당 전국 대표 대회의 경우에는 친소, 용공, 공농 지원의 내용을 지원하였다.
- 원래의 삼민주의와 구별하기 위하여, (특히 공산 계열에서) 신삼민주의라고도 한다.
- 쑨원의 사후, 삼민주의에 대한 좌파와 우파의 해석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 이는 국민당 계열과 공산 계열 양측이 쑨원의 삼민주의를 계승하면서도, 각자의 노선이 달라지면서 일어났다.
- 장제스(蔣介石)는 삼민주의에서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부분을 배격하고, 오히려 반공적 내용을 부여하는 보수적이며 유교적인 해석을 추구하였다.
- 1931년 중화민국 헌법을 보면 민족주의는 오족공화론(五族共和論)으로 변화되고, 민권주의에는 직접적 민권이 부가되었으며, 민생주의에 자본 절제가 수용되는 등의 사항이 있다.
- 민생주의에서 "경작지는 경작자가 토지를 소유한다"는 내용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서 적극 수용되었다.
- 공산당의 마오쩌둥에 의하여 신삼민주의(新三民主義)[1]로 발전되었다. 이것은 2004년 후진타오 정부가 중국 헌법에 인권에 관한 사항을 첨가하였을 때 다시 제창하였다.
민족, 민권, 민생주의
[편집]민주주의 관련 문서 둘러보기 |
민주주의 |
---|
기본 형태 |
분파, 변형 |
관련 문서 |
민족주의
[편집]초기에는 만주족의 청조(清朝)를 타도, 축출해서 민족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는 후일,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의 배경 사상으로서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에 의한 반식민지 상태의 침탈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되었다.
- 민족자결권의 의미를 둔다.
- 현재 중국에서 한족(漢族)과 소수 민족 간의 평등을 주창하는 사상의 배경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 1931년 중화민국 헌법에서 표출되는 "오족공화론"으로 변화된다.
민권주의
[편집]최초 발표 당시에는 청조(清朝)를 겨냥해서, 5.4운동 무렵에는 "침탈을 일삼던, 서양 및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을 맺고 있던 군벌을 타도하고 그들의 권리를 인민에게 되돌리자"는 의미였다. 나라의 이권이 청조(清朝)의, 또는 인민의 동의 없이 군벌의 독단으로 외국 열강들에게 넘어가는 일이 자주 발생되었기 때문이다.
민생주의
[편집](경작자가 주인이어야 한다는 의미의) 토지 평등 분배, 경제적 불균등 등의 개선을 의미한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권력은 인민을 위해 사용하고, 감정은 인민과 연결되고, 이익은 인민을 위해 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