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정치

우크라이나이원집정부제 공화국이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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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이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일부로 간주하였다.[1] 1863년, 1876년 두 차례 법령을 통해 학교를 폐쇄하고 우크라이나어의 사용과 출판을 금지시켰다.

1899년 새로 창당할 정당에 대해 우크라이나 민족간의 회의가 진행되었고, 후에 민족민주당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는 정당이 창설된다. 독립된 우크라이나를 건설한다는 강령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러시아 제국을 연방제 입헌 체제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현실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후에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대통령에 선출되게 되는 흐루셰우스키가 이 대회에서 집행 위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한다.[2]

1917년2월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이 붕괴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서는 자치와 독립 국가 건설에 대한 담론이 제기되었다.[3] 여러 민족을 하나로 묶던 가치인 제국이 더 이상 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면, 독자적인 우크라이나 민족 국가를 설립할 수 있다는 인식의 확산이었다.[4]

6월 전러시아 해방농노 연맹카테리노슬라프에서 해방농노 회의를 소집했는데, 이 자리에서 총재 정부의 주요 수반이 되는 마제파는 이 자리에서 우크라이나 자치의 정당성을 호소했고[5] 이 요구는 회의의 결의안에 포함되었다.[6] 중앙 라다는 11월 7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한 뒤 이듬해 1918년 1월 9일 독립을 선포한다.[7] 이 과정에서 이사크 마제파,[8]

10월 혁명 이후 1919년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최초의 우크라이나 헌법을 채택했다.[9] 하지만 이는 명목상의 헌법이었으며 소련 헌법의 형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 헌법은 사회주의법의 하위 법률이었다.[10] 소련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도시에 러시아인과 비러시아계 소수민족의 이주 정책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11]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처음으로 러시아화를 비판했고[12] 이러한 분위기에서 최초의 우크라이나인 공산당 서기알렉세이 키리첸코(Кириченко Олексій Іларіонович)가 당 서기를 맡게 된다.[13] 그러나 이후 전개된 탈스탈린화 정책은 우크라이나 민족을 고려한 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14]

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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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에서 결선 투표제를 시행하고 있으며[15] 선출된 대통령은 외교 및 안보 정책을 주관하고 외무부, 국방부, 정보기관의 장관과 국장을 임명하는 등 외교 정책을 맡으며, 의회는 총리, 내각의 인사, 중앙 정부의 기관장를 임명한다. 임명된 총리는 대통령이 맡는 외교 안보 정책을 제외한 내각의 인사를 결정한다. 다시 의회는 모든 장관들에 대한 심의를 거칠 수 있으며, 이들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1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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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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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승진 2012, 338쪽: "1917년 이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소러시아, 남러시아로 부르며 복속된 지방으로 간주하였다"
  2. 한정숙 2014, 380쪽: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와 급진적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시인 이반 프란코와 의기투합한 흐 루셰프스키는 1899년 민족대회에서 프란코와 함께 새로 창당될 정당의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당은 ‘민족민주당’이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민족민주당은 민족문제와 관련해서 궁극적으로 미래에 독립 우크라이나를 건설 한다는 강령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적 목표는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우 크라이나인들의 통일과 자치를 획득하고 러시아제국을 연방제 입헌체제로 전 환시키고자 하는 러시아령 우크라이나인들의 노력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3. 한정숙 2014, 373쪽: "1917년 2월 혁명 후 우크라이나 군중 사이에서 자치 자율을 향한 요구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 데는 이 같은 민족담론의 뒷받침이 있었다"
  4. 한정숙 2014, 373쪽: "이렇게 하여 역사연구에 바탕을 둔 민족 독자성 담론이 민족정체성 형성 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상위주체였던 제국이 붕괴하고 제국의 가치가 더 이상의 효력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면 우크라이나 대중 사이에서도 상당한 정도로 민족적 독자성론이 확산되는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
  5. Гаврик 2012, 107쪽: ""
  6. Гаврик 2012, 107쪽: "Зрештою, ця вимога увійшла до резолюції з’їзду" (그 결과 이는 대회의 결의안에 포함되었다)
  7. "중앙라다는 1918년 1월 9일(신력 22일)자로 작성된 제 4차 포고문을 통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73)"
  8. Гаврик 2012, 66쪽: "Мета цієї статті — висвітлити внесок І. Мазепи, одного з лідерів українського визвольного руху, в державне та конституційне будівництво України доби Директорії" (이 논고의 목적은 우크라이나 해방 운동에 참여했던 지도자 중 한 명인 이사크 마제파의 국가 건설 및 헌법 작성에 기여한 바를 기리기 위함이다)
  9. 최승진 2012, 338쪽: "10월 혁명이후 1919년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최초로 헌법을 채택하였다"
  10. 최승진 2012, 338쪽: "명목상의 헌법이었으며 형식도 소연방헌법을 그대로 모방하였으며 내용도 연방법의 하위 개념이었다"
  11. 최승진 2012, 338쪽: "러시아 정부는 날로 확장되어가는 우크라이나 도시에 러시아인은 물론 비러시아계 소수민족 이주민 정책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사회주의 건설기간동안 우크라이나의 주요도시에는 약 3배에 달하는 인구로 증가했으며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삼고 있는 이들을 실질적으로 행정, 산업, 무역, 교육 등에 배치시켜 러시아화를 가속화하였다"
  12. 최승진 2012, 338쪽: "스탈린이 사망하고 1953년 6월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18년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화를 비판하였다"
  13. 최승진 2012, 338쪽: "이런 상황의 발발과 몇가지 정책 등을 이유로 당 1서기 멜리코프 (Меліков)를 사임시키고 최초 우크라이나인 키리첸코 (Кириченко)를 앉히게 되었다.
  14. 최승진 2012, 338쪽: 하지만 제20차 당 대회가 결정한 탈스탈린정책도 민족정책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15. 허승철 2010, 283쪽: "우크라이나는 대통령 선거에서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결선 투표제를 시행하고 있다"
  16. 박정호 2011, 10쪽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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