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중 동 (窒中同, ? ~ 기원전 195년 )은 전한 초기의 군인이다. 개국공신 서열 71위로 청후(淸侯)에 봉해졌다. 이름을 《사기 》에서는 공중(空中), 《한서 》에서는 실중동(室中同)이라고 하는데, 《사기색은 》에서 사마정 은 '공중'은 성으로 질중(窒中)이라고 쓰기도 하며 사기에서는 이름자가 누락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천쯔(陈直)는 질중선(窒中宣)·질중재(窒中宰)·질중광(窒中光)·질중수(窒中遂) 등 질중씨의 존재가 확인되는 인장 유물이 발굴됨을 근거로, '질중'이 옳으며 '실중'은 도중에 표기가 와전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본 문서에서는 천쯔의 논거를 따라 '질중'으로 표기한다.
노장(弩將)으로써 고제 를 따라 거병하였고, 한나라에 들어가 도위(都尉)가 되어 항우 와 대나라 를 쳤다. 공적이 진동 에 비견되었고, 청후에 봉해지고 식읍 1,000호를 받았다.
고제 12년(기원전 195년 )에 죽으니, 시호 를 간 이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질중성 이 이었다.
사마천 , 《사기 》 권18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 반고 , 《한서 》 권16 고혜고후문공신표(高惠高后文功臣表)
1 ~ 10위 11 ~ 20위 21 ~ 30위 괴성존후 주설 (21 또는 22)[1] 도창장후 주진(23) 염차후(24) 원경(元頃)|원류(爰類) 성경후 동설(25) 유구제후 융사(26) 고성장후 윤회(26) 아릉경후 곽정(27) 광엄장후 소구(28) 하양장후 진연(29) 요이후 공취 31 ~ 40위 비어후 진하 (31) 평도후(32) 패가(沛嘉)|공사희(工師喜) 무강장후 장불식(33) 여려[2] 애후 주조(34) 대정후 대야(35) 세제후 여박 (36) 해양제신후 요무여(37) 척구의후 당려 (40) 41 ~ 50위 동무정후 곽몽(41) 고원제후 병천 (41) 악성절후 정례(42) 선곡제후 정의(43) 위기장후 주정 (44) 창무정신후 선녕(45) 강양제후 화무해(46) 곡역헌후 진평 (47) 동모경후 유조(48) 균장후 장평(48) 복양강후 진서(49) 의씨경후 진속 51 ~ 60위 61 ~ 70위 71 ~ 80위 청간후 질중동 강간후 유승(留勝)|강어후 유힐(留肹) 영릉이후 여신 축아효후 고읍(高邑)|고색(高色) 자조단후 적|극주 오제후 양성연 당양애후 손적 영장후 위선(魏選)|위속(魏遬) 장절후 모택 기신광후 진창 81 ~ 90위 91 ~ 100위 순경후 온개 역간후[5] 정흑(92) 고릉어후 왕주(92) 무원정후 위거 오방장후 양무 번장후|평엄후 강첨(彊瞻)|장첨사(張瞻師) 분양(장)후 근강(96) 심택제후 조장야(趙將夜)|조장석(趙將夕)(98) 송자혜후 허치 알지절후 풍해감(馮解敢)|풍해산(馮解散) 101 ~ 110위 111 ~ 120위 121 ~ 130위 131 ~ 137위 열외 ※ 번호가 없을 때에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순서가 내려간다. 이름이나 시호, 봉작의 표기가 《사기》와 《한서》가 다를 때에는 (《사기》의 표기)|(《한서》의 표기)로 쓴다. 이탤릭체는 고조 사후 봉해졌으나 위계가 기록된 경우다.
↑ 《사기》에서는 21위, 《한서》에서는 22위라 한다. ↑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 《사기》에는 순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 《사기》에서는 '양하제애후'에 이름은 기록이 없고, 《한서》에서는 '양하제후 기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 《사기》에서는 봉읍을 마(磨)라 했으나, 《사기색은》에서는 이를 오류라고 했다. ↑ 《사기》에서는 116위, 《한서》에서는 126위라고 한다. 《사기》를 따를 경우, 척새와 순위가 중복된다. ↑ 원래는 항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