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암
천진암(天眞菴)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1203에 있는 천주교 성지다. 조선시대 이곳에 있던 암자에 피신해 온 초기 천주교인들을 스님들이 피신시켜주고 보호해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스님이 희생되었다. 바로 이런 역사가 있는 천진암에서 한국 천주교 역사가 시작되었다. 2007년 기준으로는 암자터만 남아 있고 이 일대는 천주교에서 성당을 세우는 등 성역으로 개발중이다. 이곳에는 천주교를 창립하는 데 공헌한 다섯 사람의 무덤이 있다.
역사
[편집]천진암(天眞菴)은, 고조선(古朝鮮) 시대 제정일치의 관습으로, 본래 단군영정 천진을 모시고 산제사, 당산제, 산신제 등을 올리던 천진각 혹은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 당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하며, 특히 일부 선사시대 석조 흔적으로 추정하는 현상을 볼 때, 삼국시대(三國時代) 그 이전부터 소박한 토속신앙의 현장으로 여기며, 훗날 천진암이 되어, 1779년을 전후하여 폐찰이 되었었으니, 정약용 선생 글에,
"천진암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요사체는 반이나 무너져 빈 터가 되었네
(寺破無舊觀,樓前僚舍半虛舊)"
"천진암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다가 이제는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天眞菴爲古寺造紙物今屬司饔院)"
고 함으로써, 사찰로서의 기능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성 다블뤼 주교는 1850년 경 기록한 글에서,
이벽 성조께서 젊은 선비들과 함께 수도(修道)와 강학(講學)을 하던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거처(폐가옥)이었다(l'edifice isole et perdu)
고 하였다.
1779년 당시 이벽 성조 25세, 정약용 17세, 정약종 19세, 정약전 21세, 이승훈 22세, 이총억 14세, 권철신 44세, 등 주로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이상한 천주교 책을 읽고 토론하는 내용을 일반 유교 서당에서나 정상적인 사찰에서, 또는 일반 가정에서는 실천하기 어려우므로, 다블뤼 주교의 기록대로,
폐허가 된 천진암에서는 여럿이 모여 함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pour s'y livrer ensemble a des études profondes),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니, 천진암은 바로 한민족의 유교 선비들이 불교 암자에서 천주교를 연구하고 실천하기 시작한, 유·불·천이 사람과 장소와 사상을 합류한 곳이고, 조선천주교회가 태동된 한국천주교 발상지이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자이신 광암 이벽 성조께서 천진암을 근거지로 활동하신 바가, 정약용 선생의 글에 적잖이 보이고 있으니,
"1779년에 천진암에서 강학을 할 때(己亥冬講學于天眞菴),
이벽이 밤중에 와서 여럿이 촛불들을 밝히고 경서를 담론하였으며(雪中李檗夜至張燭談經)", 그후 "정사년(1797) 단오날에 두 분 형님들(정약전)과 천진암에 와보니, 이벽의 독서처, 곧 이벽의 수학 도장 건물이 아직도 그저 있구나 !(端午日陪二兄游天眞庵 李檗讀書猶有處)"
하고 시를 읊어 밝히고 있다.
정학술의 이벽전에서는,
"무술년(1778) 기해년(1779)에 이벽 광암 선생이 광주 원앙산사 곧 천진암에 은거하시며 정씨 이씨네들과
어진 벗들과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그 당시, 도우가 중도를 이루어,학문을 연구하고 덕을 닦는 공동체가 되기에 이르니(其門下如叢林), 저들에게 성교요지를 하필하시었다."
고 밝히고 있다. 즉 천진암을 본거지로 하는 [천학 총림]이 젊은 선비들 중심으로 형성되었었다는 것이다.
1827년에 65세의 노인이 된 정약용 선생은 옛날의 동료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천진암을 찾아와 현장에서 지은 시에서,
"이 곳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사이로 난 실같은 오솔길은 내가 어린 아이 적에 오르내리며 놀던 길인데
(昔我童時遊), 여기서 우리는 중용, 대학, 서전, 주역, 즉 상서를 다 외운 후 불에 태워 물에 타서 마시는 소련을 하였었지(尙書此燒鍊)! 더욱이 저명한 호걸들과 선비들이 모여 강학을 하고, 독서를 하던 곳이 바로 여기였지(豪士昔講讀)!"
하며, 옛 추억을 회고하였다.
1836년에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 聖 모방(Maubant) 신부는 1838년에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본부로 보낸 보고서에서,
"이벽은 천주교에 푹빠져서, 몇몇 개종자들과 힘을 합쳐(de concert avec quelques proselites),
1783년에 북경으로 ‘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을 자기들 공동체의 대표자로 파견하여 (il envoya un autre delegue) 이듬해 즉 1784년 2월에 영세하고 돌아왔다."
하였으니, 이승훈 성현을 파견하던 이벽 광암공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의 단체가 있던 본거지가 바로 천진암으로 이 젊은 작은 공동체가 한국교회의 출발이 된 총림이었다.
이 [강학회]를,[총림],[소림],[강학],등으로 정약용 선생은 표현하였고, 영국의 Longford 교수는 1800년대 말에 그의 연구서에서, 젊은 양반 선비들의 연구모임 [동호인회]라고 하였으며, Daveluy 주교는,[강학회]라고 표현하였고, 김대건 신학생은, [철학자들의 모임]으로 표현하였으며, 성 피에르 모방(聖 Pierre Maubant) 신부는 새로운 [개종자들의 단체]라고 보고 하고 있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께서는 79위 조선순교자 시복식 강론 첫머리에서, 이벽의 업적과 이승훈의 활동을 거명하며 조선천주교회가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가기 전에 성직자없이 조선 평신도들이 세웠음을 격찬하셨다.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께서도 한국순교자 24위 시복식 강론 첫 머리에서 같은 내용으로 한국천주교회의 기묘한 창립을 말씀하시며, 전 세계 교회사에 없는 기묘한 위업을 밝히시며 한국교회를 들어 높혀 말씀하셨다.
1984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께는 103위 시성을 계기로 하시는 강론에서 다음과 같은 보다 구체적인 강론으로 한국천주교회의 신비롭고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자발적인 교회창립활동을 강론 첫머리에서 강조하셨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실상 진리 탐구에 충실한 한국의 저 평신도들- 즉, 한국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모임인
한 단체는- 중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 당시 북경천주교회와의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였고, 특히 새로운 교리서적들을 읽고 그들 스스로가 알기 시작한 생호한 신앙에 관하여, 자기들을 밝혀줄 수 있을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나섰습니다. 남녀 이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해야 하며,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이 없이-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L'Osservatore Romano).
1993년 동 교황 요한바오로2세께서는 한민족 100년계획 천진암 대성당 머릿돌에 친히 작성하셔서 친필 서명하여 주신 교황강복문에서 좀더 명확히 또 우리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한반도 평화통일 사목시책을 밝혀주셨습니다.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에 건립되는 새 성전 머릿돌에 교황강복을 베푸노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온 겨레가 영원히 화목하기를 비노라".